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HISTORY

신라 말기 혼란 / 향교와 서원 / 조선 후기 문학 / 조선 군사 제도 / 산미증식계획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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혼란스러운 신라 말기

 

시기 : 9세기 말 진성 여왕 때 극심


원인 : 흉년과 전염병, 귀족들의 농민 수탈 및 사치·향락 → 국가 재정 궁핍 → 중앙 정부의 세금 납부 독촉 → 농민 봉기


대표적 봉기 : 889년 원종·애노의 난(상주)-진성여왕, 896년 적고적의 난(경주 인근까지 진입), 양길, 기훤, 견훤(완산주) 등

 

비교 : 공주 명학소에서 망이 망소이의 난 - 고려 무신기 1176년(명종 6)  

 

농민항쟁이 벽서, 괘서, 투서 등으로 나타남 - 19세기 세도정치기  

 

 

 

 

 

 

향교 - 고려 시대에는 주요 군현에만 존재, 조선 시대에는 모든 군, 현에 설립됨

 

공자와 선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례를 위한 대성전, 동무, 서무 등 문묘가 있고, 학생들이 공부하고 기숙하는 명륜당, 동재, 서재도 있다.

 

향교 정원은 인구 비례이고 중앙에서 교수 또는 훈도를 파견하였다.

 

매년 두 번씩 시험을 봐서 우등자는 생원, 진사 시험의 초시 면제, 성적 미달자는 군역을 했다

 

서원과 향교

 

서원은 돌아가신 유학자들을 추모하며 제사를 지내고 그 지역 양반 자제들의 교육을 담당했던 곳(사립)

 

서원을 기반으로 사림들이 세력을 키워나가기도 했고, 붕당의 토대가 되기도 했던 곳입니다.

 

향교는 조선시대때  4부 학당 / 향교가 있었는데요  4부 학당은 수도권에 있는(공립)

 

향교는 지방에 있는 중등 교육기관(공립)

 

+ 향교에서 가르치는 교육내용은 소학(小學), 사서오경, 제사 등이 있었습니다.

 

+ 향교는 조선 중기 이후에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잃고 문묘제향의 형식만 남게 되었습니다.

 

+ 향교는 나라에서 지급되는 학전(學田)이라는 토지를 이용해 재원을 확보했습니다.

 

 

 

 

 

조선 후기는 진경산수화가 발달하였다.

 

조선 후기는 중인들이 시사를 결성하여 창착활동도 하였다.

 

이러한 중인들의 문학을 위항문학이라 하였다.

 

비교 : 조선 전기는 서거정이 역대 시와 산문을 모은 동문선을 편찬하였다.

 

 

 

 

 

 

조선 전기 군사 제도(양난 이전)

 

중앙 - 5위(직업 군인, 한양과 궁궐 수비)

 

지방 - 영진군

 

조선 후기 군사 제도(양난 이후)

 

중앙 - 5군영 지방 - 속오군

 

 

 

 

 

산미증식계획(1920~1933)

 

원인

 

제1 차 세계 대전 중 일본의 비약적인 공업화 → 도시 인구와 노동자 수 증가로 쌀 수요 증가 → 쌀값 폭등으로 쌀 폭동 발생(1918)


전개

 

수리 시설 확충, 종자 개량, 비료 사용 확대 등 → 생산량 증가


결과

 

식량 사정 악화:증산량보다 수탈량이 훨씬 많음 → 한국인 1인당 쌀 소비량 감소 → 일제는 부족한 식량을 만주에서 잡곡을 도입하여 보충

농민 부담 증가:비료 사용료, 수리 시설 이용료 등 생산 비용 부담 → 농민의 처지 악화

만주나 일본 등 국외로의 이주민 증가

 

 

비교

 

조일통상장정(1883) -> 방곡령(1889)

 

토지 조사 사업(1912~1918)

 

회사령 폐지(1920)


내용:회사 설립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전환

목적:일본 기업의 자유로운 한국 진출

결과:김성수의 경성 방직 주식회사 등 일부 민족 기업 성장


관세 폐지(1923)

 

한국과 일본 사이의 관세 폐지 → 한국은 일본 상품의 소비 시장으로 전락

 

미곡 공출, 식량 배급(1940년대)